고령자 백신 지원, 거주지에 따라 달라지는 건강권: 심각한 지역 격차 문제 심층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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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령 사회 진입을 앞둔 대한민국에서 노년층의 건강 관리는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국가적 과제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특히 감염병 예방을 위한 백신 접종은 건강한 노년을 위한 필수적인 방패막으로 여겨지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고령자 예방접종 지원 시스템은 심각한 허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국가가 책임져야 할 공공보건의 영역이 각 지방자치단체의 재량에 맡겨지면서, '어디에 사는가'가 건강권을 결정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일한 세금을 내는 국민임에도 불구하고, 거주 지역에 따라 예방접종 기회가 박탈되거나 제한되는 것은 사회적 형평성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단순히 복지 혜택의 차이를 넘어, 국민의 기본권인 건강권 보장에 대한 국가의 책무를 묻는 중요한 잣대가 되고 있습니다.

국가예방접종의 사각지대: 지자체에 떠넘겨진 고령자 건강권
현재 대한민국의 국가예방접종(NIP) 지원 사업은 연령대에 따라 뚜렷한 불균형을 보이고 있습니다. 영유아 및 어린이의 경우, 총 19종에 달하는 필수 백신이 무상으로 제공되어 감염병으로부터 두텁게 보호받고 있습니다. 이는 미래 세대의 건강을 위한 국가의 적극적인 투자이자 책임감의 발현으로 평가받습니다. 하지만 정작 면역력이 저하되어 감염병에 가장 취약한 계층 중 하나인 노년층에 대한 지원은 인플루엔자(독감)와 폐렴구균 단 두 종류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대상포진, 파상풍-디프테리아-백일해(Tdap) 등 노년기에 치명적일 수 있는 다양한 감염병에 대한 예방은 사실상 개인의 선택과 경제적 부담에 맡겨진 셈입니다. 이러한 국가 지원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일부 지방자치단체가 자체적으로 예산을 편성하여 대상포진 예방접종과 같은 소규모 지원 사업을 운영하고 있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중앙정부가 책임져야 할 보편적 건강 보장의 의무가 지자체의 재정 능력과 정책 의지에 따라 좌우되는 구조적 문제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고령자 예방접종은 국가적 차원의 체계적인 관리 시스템 부재 속에서 각 지자체가 개별적으로 대응하는 파편화된 형태로 남게 되었고, 이는 곧이어 터져 나올 심각한 지역 간 불평등 문제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사는 곳이 다르면 혜택도 다르다": 대상포진 예방접종의 극심한 지역 격차
지자체별로 추진되는 고령자 예방접종 지원 사업은 필연적으로 지역 간 극심한 격차를 유발하고 있습니다. 최근 한국GSK와 주한영국상공회의소가 공동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 229개 기초자치단체 중 172곳(약 75%)만이 대상포진 예방접종 사업을 시행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나머지 57개 지역, 즉 전체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지역에 거주하는 노인들은 동일한 질병 위험에 노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공공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해당 사업 미시행 지역에 부산, 대구, 경기도의 다수 도시 등 노인 인구 비중이 높은 대도시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로 인해 약 330만 명에 달하는 막대한 수의 노인이 공공 예방접종 지원 정책에서 완벽하게 소외되는 '정책적 사각지대'가 발생한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사업을 시행하는 지역 간에도 예산 규모의 차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예산이 가장 큰 지역(울산 A군)과 가장 적은 지역(경기 B시)의 격차는 무려 46배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지원금의 액수 차이를 넘어, 지원 대상자의 범위, 지원 횟수, 선택 가능한 백신의 종류 등 사업의 질적 수준 전반에 영향을 미쳐 결과적으로 지역 내 건강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지원 내부의 또 다른 차별: 백신 종류와 대상자 선정의 불균형
지역 간 예방접종 사업 시행 여부와 예산 규모의 격차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문제일 뿐,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더욱 복잡하고 미묘한 형태의 차별이 존재합니다. 지자체마다 상이한 기준을 적용하면서 동일한 연령대의 국민이라도 거주지에 따라 전혀 다른 수준의 의료 혜택을 받게 되는 불합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균형은 크게 네 가지 측면에서 나타납니다.
- 대상자 선정 기준의 차이: 일부 지역은 특정 연령대(예: 만 65세 이상)만을 대상으로 사업을 운영하는 반면, 다른 지역은 더 넓은 연령대를 포괄하거나 혹은 기초생활수급자, 차상위계층 등 취약계층만을 대상으로 지원을 한정하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 동일한 연령과 건강 상태를 가진 노인이라도 거주하는 동네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지원 대상에서 제외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합니다.
- 지원 백신 종류의 불균형: 대상포진 백신은 크게 생백신과 재조합(사백신) 백신으로 나뉩니다. 면역력이 저하된 환자나 특정 만성질환자의 경우 생백신 접종이 금기시되지만, 다수의 지자체가 비용 문제로 생백신만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 지원 대상에 해당함에도 불구하고 의학적인 이유로 백신을 맞을 수 없는 면역저하자들은 혜택에서 배제되는 또 다른 의료적 사각지대가 발생합니다.
- 지원 방식 및 범위의 격차: 접종 비용을 전액 지원하는 지자체가 있는가 하면, 일부 금액만 지원하여 본인 부담금을 발생시키는 곳도 있습니다. 이는 결국 개인의 소득 수준에 따라 접종 여부가 결정되는 경제적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 예산 규모에 따른 구조적 불평등: 앞서 언급했듯, 지자체의 재정 자립도와 예산 규모에 따라 사업의 지속성과 확대 가능성이 결정됩니다. 재정이 열악한 지역의 노인들은 잠재적인 질병 위험에 더 크게 노출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며
거주 지역에 따라 고령자의 예방접종 기회가 달라지는 현상은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입니다. 이는 단순히 지역 간 복지 수준의 차이를 넘어, 국민의 기본권인 건강권이 침해받고 있음을 시사하는 위험 신호입니다. 제한적인 국가예방접종 사업으로 인해 발생한 정책 공백을 각 지자체가 개별적으로 메우는 현재의 방식은 지역 간, 개인 간 건강 불평등을 심화시킬 뿐입니다. 이제는 개인의 선택이나 지자체의 재량에 맡길 것이 아니라, 국가가 직접 나서야 할 때입니다. 해외 여러 선진국들이 고령층 예방접종을 국가 차원에서 제도화하여 관리하는 것처럼, 우리나라도 대상포진 백신을 포함한 필수적인 고령자 백신을 국가예방접종 사업에 편입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합니다. 모든 국민이 어디에 살든 동등한 수준의 건강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보편적이고 공평한 예방접종 지원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초고령 사회를 대비하는 국가의 가장 중요한 책무일 것입니다.